대통령 비밀안가에 다녀간 여자만 200명
유명 여배우도 포함돼...육영수 얼굴엔 멍
[연재] 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③ 절대권력 박정희는 왜 부패했나11.10.19 21:25
최종 업데이트 11.11.09 12:07![]() | |
▲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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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에 대한 계엄사 보통군법회의가 끝난 뒤 1980년 1월 중순부터 담당 변호사들은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로 시중에 나도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은밀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함구하던 김재규는 어느날 담당 변호사 한 사람을 보자고 연락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여러 비화를 털어놓았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심경의 변화를 보인 모습이었다. 중앙정보부 비밀안가를 거쳐 간 은막의 스타들에서부터 대통령의 자녀에 대한 얘기까지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비밀안가에 다녀 간 외부 여자가 어림잡아 200명 이상에 달한다는 얘기였다. 김재규는 또 자신이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잃기 시작한 이유가 그의 자녀들 문제를 직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탤런트들, '더 깊은 곳' 들어갔다 울고 사정해 빠져나오기도
변호사들은 박선호의 전임 의전과장들을 찾아 청와대 안가 술자리와 여자에 대해 검증하기로 했다. 전임 '채홍사'들인 윤아무개, 이아무개, 김아무개씨(육사15기, 예비역 대령)로부터 김재규의 접견 내용을 검증했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 C", L, L', W씨 등이 비밀안가의 깊숙한 곳까지 거쳐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모의 H, K씨는 안가의 깊은 곳까지 갔다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빠져 나왔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박정희의 주색 행사는 꼭 부인 육영수씨가 서거한 뒤부터 외로워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육씨가 살아 있을 때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았다. 육씨의 얼굴에 멍 들어 있는 것이 청와대에 접견 차 갔던 외부 여성인사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다. 출입기자들이 넌지시 묻지만 박정희의 언짢은 헛기침 하나로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다.
1973년 청와대에서는 경호실장이 사정수석비서관의 방에 가 엽총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호실장은 박종규, 사정수석은 홍종철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육영수씨가 사정수석을 시켜 경호실장의 뒷조사를 한 것이었다. 육씨는 박정희의 옆에 딱 붙어서 술과 여자까지 챙겨주는 박종규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육씨는 사정수석이던 홍종철에게 박종규의 부동산 보유 현황과 사생활 등을 조사하도록 부탁했다. 우선 박종규의 비리를 캐야 그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수석실의 움직임은 박종규의 정보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아 챈 박종규는 엽총을 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들어 소리쳤다.
"야, 홍종철. 당신이 내 뒷조사를 한다며!"
격분한 박종규는 엽총을 두어 발이나 쏘았지만 총알은 천장에 맞고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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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한 행사장에서 차지철 경호 실장 등과 함께 자료를 보고 있다. (왼쪽에서 2번째부터 차지철, 박정희,이상열,박종규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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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씨가 생전에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박종규였던 것도 박정희의 술과 여자 때문이었다. 박종규는 육씨가 1974년 8·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숨진 뒤에야 그 책임으로 경호실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아이러니 이상의 기구한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에 관한 비화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해도 훨씬 더 많다. 비화를 더 들출 것도 없이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금언을 그대로 입증한 셈이다. 민주정부의 기본 조건은 견제와 균형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장이든, 대법원장이든, 아니면 중앙정보부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모든 국가권력은 견제받는 장치가 있고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제 멋대로 휘두르지 못한다. 견제 없는 절대권력자는 반드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전횡하고 결국 인간의 약점인 도덕적인 금도를 벗어나 쾌락 추구에 빠지고 만다.
유신은 국민기본권 말살한 '현대 절대주의' 체제
박정희가 강행한 유신체제야말로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영구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정치의 조건인 권력분립과 국민기본권 보장이 무시되고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주의 체제였다.
첫째,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다. 집권세력이 자의로 작성한 것이어서 사실상 '사문서'나 다름없다. 국민투표도 온갖 부정 투표였다. 그런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해서 그 이전의 위헌적 절차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선언과 비상조치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것은 초헌법적 체제 파괴로 사실상 '내란행위'였다.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은 규정돼 있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제를 운영하는 민주 헌정이라면 어느 나라든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규범이다.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과 1948년의 제헌 헌법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이념으로 이어져 온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주권의 기본규범을 상실한 이단적 통치규범일 뿐이다.
둘째,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한 뒤 비상국무회의에 유신헌법안을 회부해 의결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되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국무회의가 국회의 권능을 대신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행정부가 입법권까지 행사했으니 이야말로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우려한 국가권력의 독점이며 전제체제였다.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유신헌법은 집권자가 자기 권력을 자의로 만들어 갖는 절대군주의 행위나 다름없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정치 코미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90% 이상 지지는 공포정치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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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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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박정희의 후계 진영은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고 내세운다. 이른바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실시됐다. 언론의 비판적 보도도 금지됐다. 더구나 비상계엄령이 지속되고 군 탱크가 진주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이러고도 무슨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니,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행태다. 세계 정치사에 그런 선거나 투표가 있은 적이 없다. 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이른바 '95% 이상 찬성률 공작'이라는 지침을 행정부 공무원들과 관변단체, 그리고 군 간부들에게 강요했다.
나는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 반독재 학생운동을 하다가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제적당한 채 군대에 강제입영된 소총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 대학의 학생간부 177명을 체포, 고문조사한 뒤 모두 제적시키고 군대로 끌어 넣었다. 그것은 다음해 유신체제를 강행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 유신헌법의 국민투표를 군대에서 맞은 나는 강압, 공개, 대리 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투표일 아침부터 기표장소는 비밀보호 장치는 아예 없었고 중대 인사계가 한 명씩 들어가는 사병들에게 투표용지를 들이밀었다. 인사계는 투표지의 반대란을 아예 손으로 가린 채 찬성란만 펴서 내밀고 기표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투표할 것을 미루고 있다가 대대장 앞에 불려갔다. 철책선 아래 중대장 막사에 나타난 대대장과 오전 내내 면담이란 것을 했다. 나는 그래도 독대하는 자리여서 대대장에게 항변했다.
"이런 국민투표는 역사적으로 후대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대대장은 구구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워낙 골치 아픈 존재가 하나 자기 부대에 와 있는 것이고 또 보안부대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시끄럽게 사고만 치지 않게 관리하면 될 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 상병, 차라리 투표하지 말지."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기권한 내 표는 어디로 가고 우리 대대는 1명의 무효표만 빼고 100% 찬성이었다. 내 표를 누군가 찬성으로 기표한 것이다. 무효표 하나는 어느 고참 하사가 인사계의 손에서 투표지를 나꿔채 반대란을 찍었으나 행정요원이 다시 찬성란에 기표한 것이었다. 그 하사는 보안부대에 불려가 폭행당한 뒤 후방으로 전출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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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신교 궁정동투표소에서 부인 육영수씨와 장녀 박근혜씨와 함께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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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사례는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스트 체제가 대중민주정치의 형식을 통해서 배태된 것과 똑같다. 유럽에서 전체주의의 성립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불신과 위기론을 야기한 것도 바로 국민대중은 정치권력의 공작 대상이라는 사실이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넷째, 유신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헌법조항을 없애 버렸다. 헌법에서 시민적 기본권을 삭제함으로써 후에 독재권력이 긴급조치로 제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또 형사법 절차에서 인권보장 장치인 구속적부심사제를 폐지했다.
이것만 보아도 유신헌법은 시민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사고에 젖어 있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 사실상 임명해 의회정치 유린
다섯째,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해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인준받아 국회의원으로 임명했다. 또 본래 헌법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일반 법관은 법관추천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했으나 이것도 대통령에게 맡겨졌다.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대통령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고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 분립은 없었다.
권력 분립론은 절대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민주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결과물이다. 그 귀결은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으로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였다.
결국 대통령 박정희는 아무런 견제 장치 없는 절대권력자가 됐으며 그 결과 인간적 탐욕의 노예로 전락하는 전형적인 길을 가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1970년대편 3권』(인물과사상사, 2002년 11월)
강준만
▲박정희(1917∼1979)
손찌검까지 동원된 육박전
많은 사람들이 박 정권하의 정치를 가리켜 ‘요정 정치’라고 한다. 모든 중요한 논의와 거래와 음모가 요정이라는 밀실에서 행해졌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그 실상은 ‘매매춘 정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매춘 정치’는 매매춘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존중심 결여라고 하는 점에서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모진 고문과도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나 재미가 아니라, 그런 진지한 문제 의식을 갖고 박정희의 엽색 행각을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박정희의 매매춘 행위 또는 엽색 행각은 육영수 생전에도 왕성했다. 박정희는 경호원 1명만 대동하고 나가는 ‘심야 단독행사’도 자주 즐겼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박정희 일가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했다. 당시에는 박종규만이 야행 시간과 장소를 아는 ‘천기’에 속했다. 육 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박 경호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 체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스태미나가 절륜했고 상대는 두세 차례 만난 뒤 꼭 바꾸었다. 그래서 교유 여배우 숫자가 많아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
한번은 육영수가 ‘현장’을 덮친 적도 있다
“1970년대 초반 인기 절정의 모 여배우를 박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의 한 기업체 사장 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가 육 여사 귀에 들어갔다. 당장 그 집을 찾
▲육영수(1925∼1974)
아간 육 여사는 방문 앞에서 ‘나예요, 문 열어요’ 하고는 박 대통령과 맞부딪친 적도 있다. 이 상황에서 체면 없기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의 엽색 행각 때문에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70년대 언젠간 육영수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이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눈에 포착되어 박정희의 손찌검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적도 있다. 육영수가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가 문제라고 결론 내리고 사정담당 수석비서관 홍종철을 시켜 박종규의 비리를 캐내 자르려는 시도까지 한 적이 있었다. 박종규가 그걸 알고 엽총을 들고 홍종철을 죽이겠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그걸로 끝나 버렸고 그 뒤론 박정희에게 여자를 공급하는 일을 경호실이 아닌 중앙정보부가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깊은 밤 ‘H 아파트’에 대통령이 나타난다
그러나 박정희에겐 그래도 부부싸움을 하던 그때가 좋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엽색 행각은 육영수의 사후엔 더욱 대담해졌다. 박정희의 서울 압구정동 H 아파트 출입 염문이 귀에서 귀로 번진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H 아파트에 사는 배우 J양을 만나기 위해 깊은 밤 대통령이 나타난다’, ‘그 분의 여염집 나들이 때는 잠시 X동의 전깃불이 나간다’, ‘K여고를 나온 재벌집 며느리가 목겸담을 퍼뜨리다 혼쭐이 났다’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문들이 대체로 사실로 확인된 것은 81년께 서울 민사지법에서였다.
현직 법관 H씨의 얘기.
“81년경 기이한 민사소송이 들어왔다. 그 아파트 6동엔가 사는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당한 돈에 대한 반환 청구소송을 낸 것이었다. 그 주부는 승강기에서 대통령을 목격했고 즉각 경호원들로부터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동네 주부들에게 귀엣말을 해 이 사실이 한 경찰관의 귀에 들어갔다. 문제의 경관은 발설한 아주머니를 유언비어사범으로 입건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갈취했다. 상당 기간 뜯어낸 액수가 1000만 원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죽고 세상이 바뀌자 주부는 분한 생각에 …….”
박정희가 지방 순시를 한다고 그걸 거르는 것도 아니었다. 70년대 후반의 한 사례를 보자.
“김용태 의원이 대통령과 함께 포철에 들렀다가 숙소인 울산 현대중공업 영빈관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젊은 아가씨들의 영접을 받았다. 서울의 유명한 요정에 있던 아가씨들이 단체로 출장온 것이다.”
사흘에 한 번씩 연예인 1백 명 섭렵
▲김재규(1926∼1980)
10ㆍ26 사건을 수사한 합동수사본부 수사제1국장 백동림은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불만과 비판이 마침내 미움으로까지 증폭된 데는 박정희의 복잡한 여자관계도 작용하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여자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난잡하다고 여러 차례 불평을 했답니다. 10ㆍ26 사건을 수사하면서 대통령의 여자관계 수사를 했는데,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여 중간에 그만두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그랬던 걸까?
10ㆍ26 사건의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와 같은 대통령 전용 ‘관립(官立) 요정’은 모두 5곳이나 있었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박정희를 위한 ‘채홍사(採紅使)’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음탕한 술자리는 한 달에 10여 차례나 열렸으며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만 해도 1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경호실장 차지철도 ‘채홍사’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TV를 보다가 지명한 경우가 30%쯤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를 다녀갔다”는 박선호의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박세길의 말마따나, 그건 ‘패륜의 극치’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차지철은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채홍사’ 일만큼은 중앙정보부에 떠넘겼고, 그래서 궁정동 안가를 경호 병력으로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10ㆍ26 사건도 일어나게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채홍사’ 일이 정보부로 넘어간 건 박종규 때였거니와 차지철은 박선호가 데려오는 여자들에 대해 미인이 아니라거나 품위가 떨어진다는 등 품평을 하는 심사역을 도맡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재홍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채홍사가 구해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채홍
▲차지철(1934∼1979)
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는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 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박정희 자신이 여자들을 직접 지명하기도 했다. 그가 영화나 TV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 번 보고 싶다’고 그러면 즉시 불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갑작스런 궁정동 연회의 차출 지시로 영화나 TV 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의 힘있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서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의 가학적 섹.스관
김교식은 “모든 증언들이 일치하듯 박정희의 여자관계는 가학적이고 철저하게 자기만족 위주였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표현할 때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불안으로부터의 탈출 심리에 준한 것이었다. …… 박정희는 자신이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역사의 인물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기집권과 독재를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비판과 ‘독재자’라는 오명이었다. 그 오명이 박정희에게는 일종의 열등의식으로 전화됐고, 그 열등의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여자에 대한 철저한 유린과 정복이 동원됐던 것이다. 그가 말년에 특히 젊은 여자를 선호했던 것도 노쇠 현상에서 오는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다녔고 그들의 군인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 섹/스에 관한 한 자신에게나 부하에게나 매우 관대했”는데, 그건 박정희가 “사나이 세계에서 관능(官能)의 발산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일본적인 섹.스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의 엽색 행각도 유명했는데, 박정희는 정일권의 그런 행각을 두고, “‘그 사람 나이깨나 먹고서’ 하면서도 유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배꼽 아래 일은 남자에게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괘씸하게 생각하는 야당 지도자들에 대해선 온갖 ‘공작정치’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엽색 행각만큼은 너그럽게 봐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박정희의 정보담당관을 지낸 최세현은 박정희의 “여성관에 영향을 준 것으로는 기본적으로는 봉건적 가부장제”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에다가 일본 무협소설의 무사도라는 것이 가미되었다. 일본 무사들은 거침없이 여자들을 정복하고도 아무런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박정희도 그 무사관의 영향으로 마구잡이로 여러 여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를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클린턴이 아니었다. 박정희의 엽색 행각은 여자 쪽에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그런 게임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박 정권 치하의 폭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의 엽색 행각은 ‘매매춘’이라기보다는 ‘강간’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물론 박정희에게 접근하기 위해 애쓰는 여자들도 많았으며 박정희와 관계한 것을 과시하는 여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여가수 K는 음주 교통위반으로 단속당하자 경찰에게 “야, 너 국모를 이렇게 할 수 있어?!”라고 호통을 쳤고, 한 번 ‘인연’을 맺은 후 스스로 ‘후처’가 되겠다고 나선 영화스타 C의 경우엔 그녀의 어머니가 중정 의전과장에게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라는 항의를 한 일도 있었다. 또 박정희가 직접 지명한 스타들의 경우 반강제로 끌어오지만, 유부녀일 경우엔 본인이 거절하면 강요하지는 않는 민주적(?) 면모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강간’보다는 ‘화간(和姦)’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 걸까?
사무라이를 꿈꾼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
박정희는 일본의 무사문화에 심취된 사무라이였다. 박정희는 유신 선포 한 달 전쯤 보안사령관 강창성을 부른 적이 있다.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옷차림을 즐기곤 했지요. 만군(滿軍)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이에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 이름) 소위로 정일권 중위와 함께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그럴 때 보면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박정희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건 일본군 복장 못지 않게 사무라이 영화였다. 편집증 수준이었다. 박정희의 정보담당관이었던 최세현은 박정희의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 대한 편집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사무라이 영화는 거의 대부분 들여와서 보곤 했었다. 궁정동에 있는 독서실에도 일본 무협소설이 많았다. 대통령이 된 후에 읽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통일 스토리 『대망』은 특히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일시해서 『대망』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직접 생활에 적용시키거나 곧잘 비유를 들곤 했다. …… 그는 …… 일이백 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나 나오는 통치술을 그대로 우리 정치에 적용시켰다. 특히 일본식의 ‘요정 정치’는 한국 정치를 더욱 후퇴시키고 부패 속으로 끌어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는 일본 영화를 수입할 수 없었던 때다. 그래서 일본에 파견되어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외교 행낭편으로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한 정보부 간부는 “일본에 근무할 때 사무라이 영화나 메이지유신 전후를 소재로 한 영화ㆍTV 드라마는 거의 다 사모아 고국에 보냈었다”고 증언한다.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일본인 외교관은 자신의 저서에서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했다.
박정희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
최근 박정희가 왕실을 복원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서울교육대 교수 안천은 “박정희는 일본 왕이 지배한 식민지 시대에 성장했고, 더구나 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본 육사를 나왔다. 자연히 그의 사상적 저변에는 왕실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실상 왕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다 죽었다. 굳이 복원할 필요조차 없이 사실상의 왕실이 존재했던 것이다. 왕에게 청렴결백을 따지는 건 난센스다. 모든 국토와 신민(臣民)이 다 자기 것인데 굳이 자기 주머니를 따로 챙겨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아마 여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유부녀도 꽤 섭렵하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거절하는 유부녀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하니 자애로운 왕이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물론 아직도 박정희 예찬론자들이 있지만, 놀라운 건 그들이 박정희의 가공할 엽색 행각마저 마치 ‘옥의 티’나 되는 것처럼 가볍게 넘긴다는 사실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박 정권의 무자비한 인권유린도 그런 식으로 가볍게 넘긴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나올 수 있는 반론은 뻔하다. 물질의 영광과 위대함일 것이다. 박정희가 이루었다는 ‘한강의 기적’일 것이다. 하긴 그래서 김현이 죽기 전 그의 1988년 8월 2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말했을 게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우리는 잘살아야 하고, 잘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물질적으로 잘산다는 것을, 그는, 그냥 잘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조금 부유해졌다고, 과연 잘사는 것일까? 그는 물질을 올리고, 정신ㆍ신앙ㆍ문화를 낮춘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다. 언제까지?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 쾌락만 남을 때까지?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