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김기대님이 올린 글을 보고 생각이 나서 한마디 거들 마음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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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하느님,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우리만"을 돌보시는 하느님, "우리만"을 구원헤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실직적으로 사랑의 하느님,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셈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상의 아버지라도 아이들이 셋 있을 때 한 아이가 아프면
그 아이가 그동안 자기에게 착한 일을 했던 말썽을 부리며 살아왔던 상관하지 않고,
또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병이 낫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든 부탁을 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그 아이의 병을 고치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지상의 아버지라도 두 아이가 아플 때
한 아이는 아버지에게 낫도록 해달라고 빌었기 때문에 고쳐주고,,
한 아이는 그렇게 빌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아픔에 시달리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아픔으로 신음하는 그의 자녀들 중 자기에게 착한 일을 하고
자기에게 병이 낫도록 해달라고 비는 자녀만 고쳐주고
그보다 더 큰 아픔에 신음하는 자녀들은 못본척 내버려 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만을 돌보시는 하느님, 우리만을 구원해주실 하느님을 상정하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하느님을 밴댕이 속 같이 속좁은 쫌생이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하느님은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받에도 똑 같이 비와 햇빛을 주신다는 것을.
노자님도 아셨습니다.
도는 모든 사람에게 한결 같이 대한다는 것을.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이처럼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뭘 좀 더 잘 안다고, 우리가 순종을 좀 더 잘 한다고, 우리가 더 열심히 기도한다고, 우리가 헌금을 좀 더 많이 한다고....
우리만을 특별히 더 사랑하시리라고 믿는 믿음은 표층신앙입니다. .
심층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의 숨결에서, 심장의 박동에서, 손을 베었을 때 피가 멈추는 것에서,
새봄에 돋아나는 잎새에서, 뺨을 간지르는 미풍에서 우리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갑자기 생각나서 두어자 적어보았습니다. *
저명하신 오강남 교수님의 글을 이곳에서 보게되는군요^^
저는 재림교회에서 오랜기간 지냈지만
수많은 문제들과 한계들에 가슴아파하고있는 청년입니다.
좋은 내용의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이 드는 군요.
제 의문은 과연 하나님이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심층종교인이되고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은 표층종교인일 뿐이라는 구분이
얼마나 현실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도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재림교회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표층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만,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깨닫고 못 깨닫고에 따라서 표층,
심층 종교인으로 양분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있는 구분이 못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저도 교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불교인도 힌두교인들도 사랑하시는 것을 믿고 압니다만,
제가 스스로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심층적인 종교인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아는 것 만큼 실천하지 못하는 것도 많고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지도 못하고있기 때문인데요,
또 이 반대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했으면서도
자신이 믿는 종교를 중점적으로 계시의 빛이 임한다고 믿고
겸손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수한 사람들도 있겠죠..
제 질문의 요지는 종교인의 유형 스펙트럼이 정말 엄청나게 다양할 텐데,
단순히 표층종교인, 심층종교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주장은 비도덕적(혹은 배타적인) 종교인을 훈계하기 위한 좋은 구실은 될 수 있으나
종교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제공하지는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