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논제에 대하여 민초 버전으로 담백, 단순하게 써 보고자 한다. 사복음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신약 27권중 순차적으로 나오는 4권의 책을 말한다. 물론 예수 사후의 기록물이며 마태, 마가, 누가의 순으로 구성된 3권의 복음서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공통점이 적지 않아 그 3권의 책을 공관복음이란 학술적 명칭으로 나머지 요한복음과 구별을 하고 있다.
공관복음의 3권은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어떤 사건은 수사 표현에 있어 거의 일치함을 나타내고 있어 그 원문 내용을 그대로 빌려왔음을 감추고 있지 않는다. 그에 비해 복음서 중에 가장 나중에 쓰인 요한복음은 저자의 범상치 않은 생애만큼이나 그 내용은 깊이가 있고 그 필법은 남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와 보라, 무엇을 구하느냐”등 요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골이 깊은 특유의 표현들은 저자 요한의 내재된 영혼의 깊이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러면 4복음서의 단순 개관을 떠나 이 책들을 관통하고 있는 진정한 주제는 무엇인가? 과연 이것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그 유구한 궤적을 진중하게 유유히 진행하고 있는가?
누구들의 의례적인 대답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재림 등을 거침없고 막힘없이 호기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늘 상 하던 그 상투적인 논조로 거침없는 장광설을 펼쳐 나가며 그리스도의 군대라는 자족감에 사뭇 흡족해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교리수첩의 정연한 정리처럼 우리 주변 기독인들 사이에서 개나 소나 쉽게 하듯, 장착된 실탄처럼 입에 술술 달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4복음서에 이 고전적 주제 말고 또 중요한 어떤 것이 있는가?” 하고 묻고 싶은가. 물론 위의 내용들이 모범적인 정답이다. 나아가 이 정답을 다른 성경들과의 유기적 관계, 성경기록 배경, 거기에 원어독파까지 해댄 우리의 모범생들은 아마도 복음서를 섭렵했다는 그 지식의 포만감으로 의기양양하고 사기충만해 할 것이다. 그러나 당돌한 자들은 복음서를 기초서적, 쉬운 책으로 쉽게 단정할 것이나 진정으로 복음서에 대한 미시적 이해를 갈망하는 자들은 그 깊이와 오묘함, 그리고 자신과의 요원한 간극을 보며 그렇게 무모한 방자함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복음서가 이끌어 가고 있는 깊은 협곡의 여정과 투쟁의 상흔이 그들을 겸비하게 만들 것이다.
그대는 이 경험을 마치고 도달할 수 있는 극치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만만 유형의 우리의 모범생들은 시야를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지 못하고 자기기만의 프레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서의 이해는 예수와의 접촉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유형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문을 열고 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들은 그의 입에서 “누가 이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인가”를 탄식하게 될 것이다. 그 용광로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복음서를 함부로 쉽다고 말할 것이나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자들은 함부로 그런 읊조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여! 복음서는 인문, 교양적으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음서에 내재된 그 실체를、 그대는 알고 있는가?
계속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