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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2


(교만하게 한 말은 평생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을 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 말을 듣는 나의 자녀들은 나의 이 미련했던 경험을 통해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되고 또 나의 말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랄 뿐”이다. 연재 #31 끝부분)


 

4. 미국 영주


내 일생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일 밖에는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도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것을 감사드린다.

미국 영주문제만 해고 그렇다. 미국에 들어올 때 반드시 한국으로

나간다고 했던 결심은 딸네 집에 와서 잠시 지나면서 나이도 많아진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1965년 11월 미국에 들어올 때 나는 6개월 비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할 수없이 66년 4월경에 비자를 연기하러 이민국에 갔다. 이때는

태목이와 함께 갔는데, 안내책상에 흑인여자가 있다가 친절하게

태목이를 불러서 무슨 이유로 비자를 연기하는가 하고 물었다.

태목이는 “옆에 있는 나이 많은 분이 나의 아버지인데 어머니만 두고

먼저 한국으로 나가기가 그래서 비자를 연기하려고 한다.”고 했다.

흑인 여자는 “너희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 분이냐”고 물었다.

태목이는 “나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40여 년간 목사를 했다”고 말하자

“그러면 영주권을 신청하지 왜 비자를 연장하려 하느냐?”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태목이는 미국에 온지가 얼마 되지가 않아서

이민국과 관련된 일은 잘 모르고 더구나 전직 목사가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영주권을

얻을 수가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 흑인 여자는 영주권을 신청하는데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챙겨 주면서 영주권을 신청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 우선 비자를 연기하라”면서 수수료는 단 $10.00이라고

알려 주었다. 정말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도 매우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고 감사한 마음이 절로 났다. 태목이와 딸 경실이,

사위되는 광석 군 등이 앉아서 영주권신청서를 연구한 후에

서류를 구비하여 6월경에 나와 내 아내가 함께 영주권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조사하는 것은 매우 철저했다. 나의 많은 이력을 적었더니

기록된 대로 모든 증명을 한국에서 받아 오라고 했다. 또 미국에서는

무엇을 했는가 하기에 월급 없이 한국교회를 지도한다 했더니

그것도 증명을 해 오라 해서 대회와 화잇 메모리얼 병원

레너드 목사에게 부탁하여 제출했다. 6개월이 지난 12월에

영주권이 나왔다. 우리보다 먼저 미국에 온 자녀들도

영주권이 되지 않았는데 나는 교회에서 일을 했다는 경력 하나로

영어도 못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영주권이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 확실함을 다시 한번 알고 감사했다.


 

영주권을 받고나니 영주권을 가진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자녀를

초청하여 이민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다섯째 아들 태국이와 막내 태경이는 아직 불암동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을 빨리 미국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한국적인 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내가 영주권을 받고 너무 일찍

아이들의 수속을 시작하면 우리 영주권에 무슨 문제나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영주권이 나오고도 5개월이 지난 1967년

4월에 가서야 아이들의 수속을 시작했다. 태국이가 자기의

약혼녀인 문자와 같이 도미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기에

문자의 수속도 함께 했다. 문자는 학생신분으로만 가능할 것

같아서 마침 로마린다 대학에 있는 넬슨이라는 학장이 필리핀

우리 대학학장으로 있을 때 태중이가 필리핀에 유학 가서

그 분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적이 있어서 부탁하여 입학허가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태국이와 태경이의 이민 수속과 함께 문자의 수속도

함께 끝이 나서 1967년 8월 30일에 출국을 한다는 연락이 와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자는 한국을 떠난다고

잔치를 해서 음식을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췌장에 이상이 생겨

위생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연락이 와서 모두 문자를 위해서

기도를 드렸다. 다행이 병이 예상외로 속히 회복되어 세 아이가

67년 8월 31일에 나성 비행장에 도착을 하였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세 아이들이 도착하고 나서 두 아들보다는

문자가 더 일찍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일본 사람이 감독으로 있는

보석 가공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속히 일자리를 얻은 것에

흐뭇해하기에 기뻤다. 태국이와 문자는 결혼을 준비하여 9월 중순에

결혼을 했다. 그 후 태국이도 직업을 얻어 두 아이의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5. 가지 많은 나무- 제 1 부


문제는 막내아들 태경이었다. 나는 태경이에게 미국에서 살려면

꼭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신용이 있는 사람이 되던가,

아니면 학벌이 있던가, 그도 아니면 돈이 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태경이는 “공부는 하기가 싫다.”고 말하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좀 바보스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미 나이가 20세가 지났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고

취직이라도 되기를 기도드렸다.

다행히 태목이가 자기가 일하던 회사사장에게 부탁하여

취직이 되었다. 당시에 막일이 $1.65인데 태경이에게 시간당

$2.80을 주는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그래서 세 아이가 다

취직 문제가 해결되어 마음을 놓게 되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태경이는 한국에서부터 태경이를 데리고 있던 태국이 부부에게

의논을 하니 신혼이지만 함께 데리고 살겠다고 해서 1 베드룸

아파트 리빙룸에서 태경이를 데리고 살았다. 한 반년 이상 데리고

살았지만 새로 결혼을 한 태국이네가 태경이의 변하지 않는

생활 습관에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은 태경이가

놀러왔을 때 “네가 태국이 형 집에 있는 것보다는 우리와

함께 나가서 사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찬성을 했다.

그래서 태경이에게 책임감도 심어 주기 위해서 우리가 수입이 없으니

집세만은 네가 버는 돈에서 내라고 했다.

 

 

1968년 6월 11일, 태국이네가 세든 아파트와 같은 건물 아래층에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태경이의 직장과 집 문제가 해결되는 듯싶어

마음이 놓였다. 낮 시간에는 무료했으나 송기섭 씨 부부가

아이를 좀 보아주면 좋겠다고 하기에 그 부모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던 터라 아기를 보아주었더니 매주 돈까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태경이는 한 1년 동안 회사에도 잘 다니며 “일도 잘 한다”는

칭찬도 받는다기에 “이제 철이 드는가?”했으나 차츰 차츰

한국에서 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탈선되는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경이에게

이제는 회사에서 막일을 그만두고 기계부서(機械部署)에서 일을

해 보라고 한 모양이다. 알고 보니 태경이가 회사 내에서

막일을 하는 한은 더 이상 월급도 올려 줄 수가 없어서 기술도

배우게 할 겸 임금도 올려주기 위해서 크게 배려를 해 준 것인데

무슨 생각인지 그 제안을 거절을 한 것이다. 그런 결정이야

본인의 자유의사이지만 회사는 물론 친구들이나 형제와 부모도

“왜 그 좋은 기회를 거절하는가?”하며 타일렀더니 그 일로 오히려

더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생겼는지 점점 더 탈선되는 생활을 했다.

거기다 한국에서 친구로 사귀었던 아이들까지 미국에 들어와

함께 다니며 직장도 자꾸 빠져 신용까지 잃기 시작을 했다.

점점 걱정이 되고 이 아이의 교육을 내가 제대로 시키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가끔 몹시 심한 통증이 오곤 해서 닥터 루와

다른 의사에게 진단을 받아 보았으나 담석증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가끔 그 고통이 오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참기가 힘 들곤 했고 심지어는 땅에 구르기까지 할 정도로

고통이 심하곤 했다. 미국에 와서 의사들의 진단을 받으니

수술을 하면 될 수 있지만 꽤 큰 수술이라 했다.

또 이왕 큰 수술을 하는 김에 맹장수술도 함께 하자고 해서

겁도 없이 그리 하자고 했다.

막내딸인 경실이가 화잇부인 기념병원(White Memorial Hospital)에서

일하고 있던 관계로 모든 수속을 해 주었다.

의사들은 내가 나이가 많아 수술을 하다가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며

“수술 중에 죽어도 의사에게는 책임이 없다.”라는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하니 그러니 않아도 걱정을 했는데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근화 박사에게 수술을 받을 때에

입회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69년 9월 29일에 수술을 받도록 시간이 결정이 되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술 전에 가족이 아닌

누구를 만날까 생각을 하니 “내가 간도에서 사역을 할 때

정말 친절하게 해 주신 고 최태현 목사의 사모님을 만나

뵙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9월 27일에 찾아갔다.

찾아가 뵈니 최 목사의 사모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아들 댁에서

대소변을 받아 내다시피 하면서 계셨다. 그래서 내가 수술을

받기 전에 잠깐 뵙고 싶어 왔다고 인사를 드리고 사모님의 건강이

속히 회복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고 나왔다.

 

 

수술 후에 알게 되었지만 수술 중 내가 잠시 죽었다 살아 날 정도로

힘든 수술이었다고 한다. 수술 후에 입원실에 있으면서 티비(모니터)에

내 심장 뛰는 것을 보면서 아무 때고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교우들의 기도와 가족들의 보살핌과 하나님의 은혜로

완쾌되어 퇴원을 했다. 수술 후에 이근화 목사에게 내 수술을

참관했던 소감을 물었다.

“이 목사, 임자가 보니 내 수술이 잘 된 것 같소?”

“예,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 그간 고생이 많았겠습디다.

쓸개 한 쪽 부분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말라서 꼬인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지난 이십여 년 간 가끔 이 증세가 심해 질 때에 받은

고통은 얼마나 심했는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의 아내만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알고 있다.

이제 수술을 마치고 생각 된 것은 20여 년 동안 무슨 병인지도

모르던 것을 성경 말씀대로 말세가 되어 지식이 더하여 가면서,

특히 의학지식이 발달하면서 이렇게 나의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알아내고

수술을 하여 이제는 아무런 고통이 없게 된 것이 감사했다.

그러나 수술을 해본 경험이 없는지라, 퇴원한 후에

“수술 후의 몸 관리”에 내가 좀 실수를 한 것 같다.

좀 쉬어야 하는 데도 운동 삼아 지팡이를 짚고 장을 보러 다니면서

좀 무거운 장 봉지를 어께에 메기도 하고 들기도 하면서 무리를

했는지 수술 후 2주쯤 지나서 열이 나고 수술한 부분에 통증이 왔다.

의사를 만나 진찰을 하니 수술한 부분 안쪽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간단한 재수술을 하면 된다고 해서 입원을 하여

옆구리에 구멍을 내어 고름을 뽑아내고 봉합을 하여 약 2주 만에

퇴원을 했다. 이번에는 수술 후에 매우 조심을 하여 무사히 회복이

되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문제가 없다.

20여 년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얼마 후,

나의 맏딸 진실이가 편지에 "아버지, 우리도 이민을 가고 싶은데요."

라고 썼다. 나는 큰사위 되는 김성래 목사가 미국에 올 마음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딸에게 편지를 하기를 “김 목사도 미국에 오고

싶다고 하던가?" 하고 물었다. 내 물음에는 별다른 대답이 없이

큰딸은 계속 “이민을 오고 싶다.”고만 편지를 나에게 했다.

그래서 다시 “너희의 가장이 되는 김 목사의 의견도 잘 알아서

회답을 하라.”고 했더니 사위 되는 김성래 목사는 미국에

오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편지를 보내 왔다.

할 수 없이 나는 중한 대회장으로 계시는 김이열 목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내 딸 진실이는 미국에 올 마음이 있어서

계속 수속을 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는데 가장되는 김성래 목사는

절대로 미국에 올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김이열 목사의 객관적인

의견으로 내 딸의 가족이 미국에 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면

김이열 목사가 한번 내 딸의 가족을 만나서 부모 된

나의 심정도 전하고 또 만나 본 후에 결과도 알려 달라고”했다.

얼마 후에 큰 사위되는 김성래 목사는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오겠다.”라는 연락을 해 왔다. 수속을 시작하자 남들은

그리 어렵다는 이민 수속이 별 어려움이 없이 4개월 여 만에 끝나

진실 네 식구 다섯이 미국에 왔다. 김이열 목사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김성래 목사는 미국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이 힘들다고 하며

다시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부모 된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두 아들과 딸, 세 자녀를 위해서라도 좀 참고 지내보자고 권면을 했다.

얼마 후에 진실이는 간호원으로 일을 시작하고 우선 김성래 목사도

옷을 만드는 곳에 취직을 하여 일을 시작했다. 성래 목사도 손재간이

좋은지라 일을 열심히 하며 점점 미국생활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점점 안정을 해 나가고 후에 김성래 목사는 몇 몇

한국인 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며 미국 생활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둘째 딸 충실 네 문제가 잘 풀리지를 않아서

걱정이 많이 되었다. 둘째 사위 윤수는 서울 삼육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교육시찰 명목으로 미국에 왔다가 “미국에 있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하여 남아 있게 되었다. 여러 방면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려고 애를 썼으나 용이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그대로

귀국을 하라.”고 권유도 해 보았으나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겠다.”

고 해서 할 수 없이 변호사에게 수속을 의뢰하였는데 하루는

변호사가 서류에 싸인을 하라고 해서 별로 서류를 살펴보지도 않고

싸인을 해 주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얼마 후에 법정으로

출두하라는 통보가 왔다. 법정에 출두를 해 보니 변호사가 일을

어떻게 했는지, 판사는 윤수에게 “지금 불법체류자이니 빨리

이 나라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가 찰 일이었다.

그런데 판사가 윤수에게 “수중에 돈은 얼마나 있는가?”하고 물었다.

윤수는 무슨 생각에 “수중에 돈이 좀 있다.”라고 판사에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판사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지도않고

그 돈을 다 사용할 때까지는 미국에 거주해도 좋다고 했다.

아마 미국 돈을 해외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정책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도 되자만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가? 아니면 얼마동안

더 체류할 수 있다는 기간도 정하지 않은 채로 돈을 다 쓸 때까지

있어도 된다는 것은 정말 윤수를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장 발등에 불은 해결했으나 언제 나가라는 추방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그야말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먼저 미국에 들어온 막내딸 경실이가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면서 어려웠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당시는 시민권자의

가족이민이 많지 않은 때인지라 몇 달 후에 윤수의 아내 충실이와

딸 보경이가 미국으로 들어왔고 자연히 수녀동안 고생하던 윤수의

영주권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참으로 가족 중에 누구보다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그 기쁨은 훨씬 더 컸다.

거기다가 제후네 식구까지 미국으로 오게 된 것 역시 하나님께

크게 감사를 드렸다. 그럭저럭 나의 직계 가족이 거의 다

미국에 왔는데 약 40여명이 넘었다.

다른 부모들도 다 한 마음이겠지만 많은 가족이 모이고 보니

“모두가 다 신앙 안에서 잘되어야 하겠는데”하는 걱정과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잘 날이 없다”라는

옛말처럼 막내아들 태경이가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태목이 부부는 둘 다 유학생신분으로 미국에 와서 결혼을 하여

영주권이 없이 아들을 낳고 공부를 계속했다. 공부하는 동안

영주권이 없이 직장을 얻어서 일을 해서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몰랐고 너무 어리석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모든 식구가 도미했고 영주권을 얻었으니

태목이도 영주권을 미리 신청했더라면 그렇게 까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안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USC 약대를 다닌 후에 약사가 되어

드디어 영주권을 얻게 되었으나 그간 태목이네 부부가 겪은 마음고생은

윤수 못지않았다. 이제 태목이네도 좀 자리가 잡힌 생활을 한다고

생각 했는데 하루는 태목이가 집으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며칠만 지나면

동부 펜실바니아 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잠잠히 있다가

갑자기 미국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를 간다니 너무도 천만 뜻밖의

일이었기에 마음을 추수를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하도 섭섭하여 생각다 못해 우리도 따라 가겠다고

했더니 태목이도 “사실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고 싶었으나 너무

먼 길이 되어 말씀을 못 드렸었는데 부모님이 원하신다니

잘되었다.”하며 함께 떠나자 했다. 그러나 막상 함께 가자 해 놓고도

나는 내 안사람이 차를 타면 종종 멀미를 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을 하곤 했기에 먼 길을 차로 가는 것이 내심 크게 걱정이 되었다.

하룻길도 아니고 장장 열흘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첫날, 약 아홉 시간 여행을 했는데도 나의 아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모님을 위해 태목이는 그다지 빠르지 않게

운전을 하여 펜실바니아주까지 열흘을 여행을 했다. 내 아내는 그 긴

여행 동안 한번도 멀미를 하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끝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너는 두려워 말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오.”하신

이사야 43장 말씀을 다시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 모두 다 처음으로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무사히 인도하신 것을 감사 드렸다. 1975년 2월이었다.

태목이 가족과 함께 동부로 가서 그래도 한 서너 달 함께 지날

생각을 하고 떠났는데, 도착한지 이삼일 만에 내 아내는

나성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을 했다. 내가 가자고 재촉을 해도

더 있다가 가자고 할 내 아내가 집으로 가자고 재촉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고 뉴욕에 있는 딸, 제후 집에

이 삼일 들른 후에 나성으로 돌아왔다.

 

 

나성에 오자 방례두 장로가 우리를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

나는 이 식사초대에 응하면서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하면서

좀 미안했다. 다름 아니라 방 장로가 얼마 전 경상도 자부를

맞아들이기에 농담으로 “평안도 가정에 경상도 며느리를 보았으니

우리에게 경상도 요리를 한 번 맛 보여야 하지 않겠소?”했더니

방 장로도 흔쾌히 “아, 그래야지오”라고 대답을 했었다.

방 장로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우리가 동부에서 돌아오자

곧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한 것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방 장로님은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 이층에 살고 계셨다.

저녁 초대를 받고 나는 아내와 그 댁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 때 마침 밖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자 내 앞에서

층계를 올라가던 나의 아내가 “당신, 저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요?”

하고 묻기에 “아, 들린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내 아내는

“저 헬리콥터가 나를 잡으러 온 것이오, 아시오?” 라고 말을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지금 뭐라고 그랬소?”하고 묻자

“저 헬리콥터가 나를 잡으러 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내 아내는

대답을 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먼 길을 가서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가자!”고 야단을 하던 내 아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저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화잇부인 기념병원(White Memorial Hospital)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헬리콥터나 앰불랜스의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그날부터 내 아내는 헬리콥터 소리나 앰불랜스의 소리,

또는 순찰을 도는 경찰차를 보면 “저것은 나를 잡으러 온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대면서 겁을 먹곤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증상이

점점 더 심해갔다. 할 수없이 자녀들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다섯째 아들 태국이가 찾아와 어머니를 붙들고 간곡하게 설명을 하면

“나도 안다”고 해 놓고는 또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전에 이런 경험을 당해 본적이 없으니 어떤 대책도 없이

고통의 시간만 보내게 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얼마 지나서

내 아내는 발이 아파서 걷는 것도 불편해졌다. 나는, 내가 수술 후에

친구의 권면으로 걷는 것이 얼마나 건강 회복에 좋은지를 알게 되었기에,

내 아내의 손을 잡고 매일 아침 한 시간 가량 걷게 했다.

한 두어 달 걷자 내 아내는 걷는데 아무 불편한 점이 없어져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길을

예비해 두셨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조금 지나자, 나의 아내는 느닷없이 동부로 이사 간 “태목이네 집으로

다시 가자.”고 독촉을 해 대었다. 그래서 그러면 “이번에는 당신 혼자서

가라”고 했더니 “그리 하겠다”고 해서 내 아내만 항공편으로 보냈다.

아내가 아들집으로 떠나고 나자 그간 내가 긴장하고 있다가 풀렸는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해서 입원을 했더니 열병에 걸렸다 했다.

상당히 고생을 했다. 퇴원을 하자 자녀들은 아내가 있는 동부로

가라해서 다시 동부에 가서 두 달 있다가 이번에는 내가 돌아가자고

해서 왔다. 내 아내의 정신 문제는 그대로 계속 되었다.

더 심해지지는 않는 것 같기에 그냥 몇 달을 지냈다.

 

 

76년 초, 아내의 정신 상태 더 나빠진 것인지, 내 아내는 또 동부로

가겠다고 떼를 쓰다 시피 하기에 혼자 가게 했다. 자녀들이 다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나 나름대로 아내를 혼자 보내고 나서 아내의

정신질환의 상태를 좀 알고 싶어서 다른 때 같으면 자주 편지를

써서 보냈을 터이나 이번에는 편지도 쓰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 뉴욕에 있는 딸, 제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어머님이 아버지가 편지도 한 장 안 보내신다 하시며

노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럴 것이다. 내가 일부러 편지를 쓰지 않고 있다.”

“일부러 쓰지 않고 계시다니 무슨 말씀이신 가요?”

“어머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질 않느냐? 어느 정도로 심한지

알고 싶었는데 내가 편지 쓰지 않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라면

그리 심한 것이 아니니 마음이 좀 놓인다.”

그래서 약 5개월 계시다가 다시 나성으로 돌아왔다.

아내를 마중하기 위해 막내아들 태경이차로 비행장에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태경이가 운전을 하며 어머니에게 얼마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지 어머니의 건강보다도 태경이가 철이

든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한 말들은 어머니를 위한 것일 뿐, 태경이의 생활은 변하는 것이

보이지를 아니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동부에 갔다가 돌아온 후에 태경이는 점점 더 우리를 힘들게 했다.

용돈이 딸렸는지 심지어 우리가 사준 차까지 팔아서 돈을 써 버렸다.

이제라도 태경이 혼자 독립을 해서 살게 하려면 우리가 어디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생겨 나와 아내는 다시 태목이가 사는

필라델피아 근교 레딩으로 갔다. 79년 5월경이었다.

 

 

동부로 와서 8개월을 지내며 소식을 들으니 태경이의 생활은

나아지는 것이 없다했다. 우리가 하도 걱정을 하자, 태목이와

뉴욕에 사는 제후는 의논하기를 “차라리 태경이를 동부로 오게 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해 보는 것이 좋겠다.”하여 태경이에게

권해 보니 태경이가 80년 1월초에 뉴욕으로 왔다.

태경이가 우리를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80년 1월 16일인가 나성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에 태경이는

태목이가 사는 레딩에서 취직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나의 아내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하나님께 감사했다. 얼마 후에 태경이는

어머니 생일이라고 적은 돈을 보냈는데 이 돈을 받고 나의 아내는

생전 처음으로 막둥이에게서 생일 선물을 다 받았다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부모는 자식에게 큰 선물을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자식이 올바른

생각을 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주면 그 이상의 선물이나 기쁨이 없다.

그러나 이 기쁨도 오래가지를 못했다. 80년 6월 어느 날,

한 마디 소식도 없이 태경이가 나성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때 어머니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소식도 없이 이렇게 돌아오니

이유를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고 내 자식이니 할 수 없이

힘든 생활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화잇 부인의 예언의 신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직장을 나갈 생각이나 교회를 나갈 생각도 아니 했다.

30세도 훨씬 지난 자식에게 무엇을 어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는 길

외에는 달리 할 길이 없었다.

 

 

내 나이 90을 바라보고 내 아내가 80을 바라보면서 마음고생

하는 것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부모의

장수함을 감사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모든 자녀들이 다 모여서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다른 집안의 자녀들은 부모의 환갑이다,

진갑이다, 결혼 수 십 주년 기념이다 해서 사람들을 청하여

각종 식(式)들과 연(宴)을 갖는데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다른 사람들을 청하여 한번도 크게 대접해 본적이 없으니

한번 해 보자”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그런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도 될 뿐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이 되어

그 동안 거절을 해 왔다. 환갑식도 안한 나는 이번에도

“우리가 살아 온대로 그냥 지내자”라고 거절을 했다.

그러나 자녀들은 “그 동안 수많은 초대를 받아 참석을 했는데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남에게 욕을 먹습니다.”하며

계속 나를 재촉해 댔다.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나와,

막내 태경이와 맏사위 김성래 목사 뿐 이었다.

다른 모든 자녀들은 “그만큼 대접을 받았으면 한 번쯤 대접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하면서 졸라대기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장수(長壽)했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는

”년년익수 축하회“라고 해서 장수 감사의 모임을 갖고

연로한 분들을 청하라고 허락을 했다.

 

 

내 생애 처음 가져 보는 잔치인데 날자는 1981년 6월 14일

(일요일)로 정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에게 통지를 하면서

돈을 쓰는 것을 보니 잔치를 허락한 것이 후회되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뉴욕에서, 오레곤 등지에서 다 참석을 하고 또 많은 교우들을

초청하여 대접을 하니 ”대접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우연이도 이 일을 반대한 막내

태경이와 맏사위 김성래 목사가 참석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 특히 가족들이 함께 사진을 찍을 때에

이 두 식구가 빠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나의 아내의 정신건강은 점점 악화되는 것 같았고 또 태경이도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지를 않았다. 아내의 전지치료(轉地治療)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멀리 간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내키지를 않아 로마린다에서 혼자 살고 있는 딸, 정실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어머니와 함께 당분간 좀 가서 있겠다.”고

하니 쾌히 승낙을 했다. 다만 자기가 간호원으로 밤일을 하고

낮에 잠을 자니 미안하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서 아내는

며칠은 잘 있더니, 다시 나성으로 가자고 매일 졸라댔다.

그래서 "곧 가도록 하자"라고 이야기하며 2주정도 지났는데

하루는 아침 일찍이 아내가 보이지를 않았다.

현관을 보니 문이 휑하니 열려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밖으로 나가 사방을 뛰어 다녀도 찾을 길이 없어서

할 수가 없이 밤일을 하고 잠을 자는 정실이를 깨웠다.

차를 타고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집에서 걸어서 가기에는

꽤나 먼 로마린다 병원 앞에 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아침 일찍이 큰 개들이 많이 나다니는데 개에게 물리지도

아니하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교통사고도 없이

병원 앞에서 찾은 것은 정말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아내는 태목이가 사는 레딩으로 가자고

다시 졸라대었다. 하루는 내 아내가 태국이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당장 나를 데리러 이리로 오너라. 나 여기서 더 못 있겠다!”

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태국이는 무슨 일인가 해서

한 시간이나 되는 이곳까지 급히 운전을 해서 왔다.

그런데 내 아내는 막상 태국이를 보더니 "네가 여기까지

웬 일로 왔느냐?" 하고 이야기를 해서 모두를 혼란케 만들었다.

이때 나는 내 아내의 상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한

치매증세임을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나성집이나 이 곳

딸의 집이나 다 병원 근처가 되어서 헬리콥터와 구조대 차량이

싸이렌 소리를 내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 때마다 아내는

“나를 잡으러 왔다!”고 하면서 공포에 떨곤 하니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성 우리 집 근처에 살고

계시는 처형이 되시는 김 병숙 씨도 그 의견에 동감을 했다.

 

 

마침 동부에 있는 제후와 태목이가 다시 와 계시라는 연락이

오기에 82년 9월 14일에 나성을 떠나서 먼저 제후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왔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저녁식사를 한 다음부터

밤새 설사를 하면서 화장실을 갔다가는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다가 사위 되는 석범이가 자는 방까지 들어가니

미안하기가 그지없었다. 뉴욕에 온지 3일 째 되던 날,

제후의 아들 영태의 장모 되는 이가 저녁 식사에 초청을 하기에

너무 감사해서 아내가 설사를 해도 그 집에 갔다.

내 아내의 상태를 보더니 영태의 장모는 집에서 키우던

양귀비 줄기를 꺾어서 즙을 받아 삶아서 그 물을 약으로

만들어서 아내에게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날 아내의

설사가 많이 진정이 되어 9월 18일에 우리 부부는

레딩에 사는 태목이 집으로 왔다. 레딩에 와서도

내 아내는 정신상태가 진정이 되지 않았다. 특히 밤잠을

자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 대니 낮에 일을 하고 와서는

잠들을 잘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도무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석 달이 되어오는 82년 12월 9일 오후 3-4시쯤, 아내는

지하실에서 위층으로 올라오다가 층계에서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집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전화도 어디로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영어도 모르니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어머니를 혼자서 끌어 올려 한 층은 올라 왔는데

도저히 더 이상은 끌어서 올릴 수가 없었다.

마침 며느리 인숙이에게서 전화가 와서 속히 오라고 하여

둘이서 겨우 아내를 침실로 옮겼으나 하루 밤이 지나도록

계속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니 뇌진탕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고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침이 되자 교인 중에 김 정식 의사가 친절하게도 급히 와서

아내를 진단하더니 병원으로 속히 가보라고 했다.

다음날 인숙이와 함께 아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방사선 검사를 해보니 손 목 뼈가 많이 상했다고 하면서

회 붕대를 해 주면서 5-6개월은 잘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계속 며칠동안 더 병원을 찾아 와야 한다고 했다.

늙은 나와 며느리가 팔목이 부러진 할머니를 승용차에

태우느라고 고생하는 것을 보더니 병원 측에서 하는 말이

“비용을 병원이 부담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친절하게도 앰뷸런스를 제공해서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용하게 편리를 보아주었다. 이 나라가 왜 복을 받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회 붕대가 갑갑했는지 아내는 그 회 붕대를

밤사이에 손목에서 뽑아 버렸다. 병원에서는 회 붕대를

두 번이나 다시 해 주었는데도 아내가 계속 뽑아 버리자

의사도 화가 났는지 이번에는 팔목까지 회 붕대를 해 버렸다.

여자들이 나이가 많아지면 뼈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하니 변소나 목욕을

시킬 때마다 며느리와 둘이서 아내를 업어서 움직여야 하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년 여 동안 나성으로 간다는 일은

제쳐놓고 그 힘든 일들을 나와 태목이 가족은 해 내었다.

이렇게 집안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자 목사인 내가

고개가 숙여지고 설교를 부탁받는 것도 귀찮았다.

그러나 목사인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은 몇 명 안 되는

교우들의 배려와 사랑이었다. 내 아내가 조금 움직일 수가

있게 되어 안식일에 교회를 가면 내 아내가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일이 가장 어려웠는데 교우들은 한 번도 우리가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아내가 변소 가는 일을 돌보아 주고 우리가 쉴 수 있도록

내 아내를 자기 네 집으로 모시고 가서 하루 또는 이틀

모시고 있다가 다시 그 먼 우리 집까지 모시고 왔다.

정말 힘 들 때에 한 가족처럼 돌보아주었고 그 사랑이

나에게 용기를 주곤 했다. 목사들도 외롭고, 힘들고,

용기가 꺾일 때가 많으나 교우들의 사랑이 목사에게

용기와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내 아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 나는 나성으로 갈 수도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자 태목이 부부는 나에게 녹음기를

사다 주면서 회고담이라도 녹음을 해 보시라고 해서 이렇게

시작을 해서 진행 중이었다. 사실 나성에서 수술을 하고 나서

내가 얼마 살지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는지 모든 자녀들이

“아버지, 뭐 간단하게라도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서 남기시죠!”해서

자녀들에게라도 회고담을 남겨 주려고 몇 자 정리하던 것을

가정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서 제쳐놓았었다가 지금 글을

쓰기가 힘이 드니 녹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 ?
    지경야인 2012.03.21 02:21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 잘 보았습니다.

    세월이 그 14살의 어린 안식교인을  90의 영감님으로 만드셨군요

    우리도  점점 그렇게 흘러가겠군요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마지막 사모님의 모습은 마지막 가시기전의 저희 부모님을 보는 것 같고

    또 잠시간 노인 요양센터를 하는동안 돌보게된  치매 노인들을 보는 것 같군요

    유달리 누군가 잡으러 온다고 무서워하던 어른 한분이 스쳐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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